핑커 씨 사실인가요

🔖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된다는 신낙관주의의 주장은 안일하다. 어떤 데이터도 스스로 혼자 말하지는 않는다. 빈곤, 평화,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신낙관주의가 주장하는 팩트에는 항상 신낙관주의자들의 해석의 층위가 있었다.
신낙관주의 혹은 핑커의 기대와는 달리, 어떤 사실도 사람들의 이해관심 바깥에서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해석의 층위에서 팩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실관계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겠다는 신낙관주의의 팩트도 복잡하게 펼쳐진 사실관계 가운데 선별된 것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신낙관주의의 팩트가 강력한 힘을 갖는 것도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의 제약하에 (종종 정치적인) 의미 를 갖기 때문임을 무시할 수 없다. 신낙관주의자들은 이런 의미관계를 물신화해, 마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자신들의 팩트에는 주관적 이해와는 무관한 자기완결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이 부여하는 의미의 힘은 취하는 정치적 효과를 누리고 있다. 신낙관주의의 팩트물신주의가 정치 커 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문제적인 까닭이 여기 있다.
우리가 빈곤과 건강, 수명, 교육, 행복, 평화와 민주주의 등 사회 지표의 진보에 관심이 있다면, 신낙관주의 일각의 팩트물신주의가 질식시킨 사실관계의 함의를 복원하고, 신낙관주의의 정치적 귀결을 제대로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작업은 곧 사실관계에 기초한 합리적 정치 커뮤니케이션을 모색하는 진보적 실천이기도 하다.

🔖 그러나 로슬링의 대중 강연과 <팩트풀니스>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침팬지보다 못했던 대중의 정답률을 다 몇 분만에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팩트 그 자체보다 그것에 관한 관점을 그들에게 첫방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낱개 의 단편적 토막 정보, 팩트를 하나로 엮어 주는 과정 말이다. 건강, 부, 삶의 질, 행복, 불평등, 환경, 평화, 민주주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류는 계속 진보해 왔다는 핑커의 팩트들도 그의 관점 아래에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배치되고 있다. 그 많은 팩트들 배후에 "일관된 현상"으로서 도사리고 있는 진보가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 저 팩트들은 '진보의 승리'라는 스토리로 엮이고 있다. 그리고 그 진보의 정체란 대략 그가 좋아하는 거의 모든 것에 가깝다. 그것은 "계몽"이며, 즉 세속주의적 휴머니즘이고 열린 사회이며, 코스모폴리타니즘이고, 이성과 과학인가 하면, 고전적 자유주의, 자유시장, 자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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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건강 증진에 분명한 기여를 하는 부문의 경제 활동올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하며 그 부산물로 복지의 증진을 기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개혁개방 이전 중국처럼 1인당 GDP에 큰 향상이 없었는데도 수명이 크게 증가한 사례는 있어도, 큰 폭의 GDP 향상이 항상 큰 폭의 수명 증가로 직결된 것은 아니라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 보자. 경제성장이 건강의 증진에 기여하는 긍정적 효과는 그 이득이 분명한 구체적 경제 활동의 효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활동이 건강의 증진 등 사회 진보에 기여하도록 조율하는 최종 심급은 결국 정치다.
<지금 다시 계몽>에서 핑커는 사회지출이 사회주의의 원칙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자유시장 자본주의 역시 어느 정도의 사회복지 지출과 양립 가능하며,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 이전 사회에 비해 점점 더 큰 몫을 사회지출에 할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 사민주의 정책들이 수립되고 사회지출이 증가한 바로 그 시점에 사회운동과 정치의 역사적 역할이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사회복지 차원의 변화를 이끌어 낸 핵심에 자본주의에 도전해 온 정치가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옹호론을 읽는 순간 입에 물고 있는 음료를 바지에 쏟"을 정도로 자본주의를 싫어한다고 핑커가 비꼬았던 이들의 역사적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에스핑-안데르센의 복지국가 유형론은 물론이고, 피터 홀과 데이비드 소스키스가 발굴한 '자본주의 다양성' 개념에 기초한 연구들이 모두 정치의 심급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이론적으로 개념화한 작업들이었다. 진보를 싫어하는 지식인들이 핑커의 주장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가 경제 발전과 기술 진보에 대한 관심에 비해, 진보적 사회운동과 정치가 인류 복지에 미친 굵직한 성과들에는 인색하니 말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진보를 싫어한다며 불평하기 전에 그는 진보 사회운동가와 정치가에게 제 몫의 정당한 평가를 돌려 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 우리의 정치사회 담론에서 자주 호출되는 팩트를 분석했던 이 책의 지향도 객관적 진실이란 없다는 식의 허무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객관성은 분명 성취하기 힘든 목표지만, 여전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규범적 이상이다. 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가 팩트라고 믿는 바를 의심해 보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실을 객관적이라고 성급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 이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며, 오히려 공동체의 불건강을 예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낙관주의를 비평하기 위해 지금까지 여러 개념적 도 구들을 살펴 왔다. 구성, 관련, 가치라는 도구들이었다. 라투르가 말한 성급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앞으로 우리는 바로 이 도구들에 기댈 수 있을 것이다. 팩트를 무기로 휘두르기 전에, 팩트가 우리에게 보증해 준다고 여겼던 객관성을 맹목적으로 믿는 일을 유보하자. 그리고 팩트가 구성되는 일련의 사회적 과정을 돌아보며 우리 사회가 어떤 목적 지향 속에서 그 팩트를 구성했는지 검토하고, 그것이 우리의 이해와 연결되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 모든 과정에 있어서 지금의 커뮤니케이션이 공동체의 가치를 위한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팩트가 정보 생산의 사회적 한계와 가치 지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착각을 반성할 수 있다. 동시에 객관성이라는 규범적 이상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이다.